- 트럼프의 관세 전쟁 속에서 펼쳐지는 아시아 자동차 기업들의 생존 전략
안녕하세요. 물류의 새로운 기준, 트레드링스 입니다.
지난 3월, 워싱턴 백악관. 현대자동차는 놀라운 발표를 했습니다. 미국에 210억 달러, 우리 돈 28조 원을 투자해 생산 능력을 연간 120만 대로 늘리고, 심지어 제철소까지 짓겠다는 거대한 계획이었죠.
표면적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미국이 수입되는 자동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니, 이를 피하려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왜’라는 당연한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와 ‘그 너머의 진짜 속내’에 대한 질문입니다.
28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은 어떻게 감당하며,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이들이 그리는 더 큰 그림은 무엇일까요?
이는 비단 현대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요타를 비롯한 아시아의 경쟁사들 역시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서 저마다의 생존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관세 장벽이 불러온 거대한 투자의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계산법을 하나씩 파헤쳐 보겠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시장, ‘아메리카 퍼스트’의 현실
“아메리카 퍼스트”는 단지 정치 구호가 아니라, 아시아 자동차 기업들에게는 냉정한 비즈니스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도요타와 현대차 모두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북미 시장 한 곳에서 벌어들이고 있거든요. 도요타의 경우, 2024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렉서스를 포함해 230만 대를 판매했는데, 이는 전 세계 판매량의 5분의 1이 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현대차에게 미국 시장이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한데요. 198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품질이 떨어진다는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약 10년 전, 한중 외교 갈등과 중국 현지 전기차 업체의 급부상으로 가장 큰 시장이던 중국에서 입지가 흔들리자, 미국 시장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략적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지난해 현대차의 북미 매출은 근 1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요,
한국투자증권의 김창호 애널리스트는 현대차가 벌어들이는 전체 영업이익의 약 60%가 바로 이 미국 시장에서 나온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한 현대차 내부 관계자는 “수년간의 노력 끝에 우리 브랜드가 마침내 미국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 시장에서 결코 손을 뗄 수 없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누가 먼저 쓰러지나”…관세가 촉발한 ‘치킨 게임’
미국의 관세 정책은 아시아 자동차 업계를 그야말로 거대한 ‘치킨 게임’의 장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기업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죠. 관세 부담을 고스란히 소비자 가격에 얹거나, 아니면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고 스스로 감당하는 겁니다.
여기서 기업들의 희비가 엇갈립니다.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닛산 같은 기업들은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탄탄한 자금력과 강력한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갖춘 도요타나 현대·기아차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낮은 수익성을 감수하더라도 가격을 유지하면서, 경쟁사들이 먼저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화투자증권의 김성래 애널리스트는 이런 상황을 두고 “결국 끝까지 버티는 기업이 승자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런 극한의 버티기 경쟁은 결국 자동차 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거나, 더 큰 회사에 기대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닛산과 혼다처럼 서로 비슷한 상황에 있는 회사들이 힘을 합쳐 아예 하나의 회사로 합치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든든한 파트너가 있는 회사들이 그 파트너에게 더 기대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마쓰다와 스바루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두 회사는 모두 도요타가 많은 지분을 가진(마쓰다 5.1%, 스바루 21%) 든든한 우군을 두고 있거든요.

피할 수 없는 선택, ‘미국 땅에서 미국차 만들기’
이처럼 다른 회사와 힘을 합치거나, 기존의 강력한 파트너에게 더욱 기대는 것은 이 ‘치킨 게임’을 버티기 위한 중요한 전략입니다. 하지만 몇몇 기업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게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관세라는 압박 자체를 원천적으로 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 바로 ‘미국 내 직접 생산’에 승부를 거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높은 인건비와 막대한 설비 투자 부담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까지 현대·기아차는 미국에 3개의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판매 차량의 약 3분의 2는 여전히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해왔습니다. 하지만 관세는 이 모든 계산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습니다. 이미 미국 판매량의 54%를 현지에서 생산하는 도요타와 경쟁하려면, 현대차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게 된 거죠.
사실 이런 길을 먼저 걸어간 건 일본 기업들이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무역 압박에 대응해, 일본 자동차 업계는 지금까지 66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며 미국에 24개에 달하는 공장을 지었거든요. 현대차의 210억 달러 투자는 바로 이 40년의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으려는 과감한 승부수인 셈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처럼 과감한 결정이지만, 사실은 모든 자동차 회사가 공통으로 느끼는 깊은 딜레마 속에서 나온 고육지책에 가깝습니다.
마쓰다의 임원 노리유키 타키무라는 “미국 관세로 시작된 불확실성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미국의 관세 정책이 만들어낸 정확한 결과물입니다. 높은 관세로 압박을 가해, 결국 외국 기업들이 자국 내에 공장을 짓도록 유도하는 정책적 목표가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셈이죠.

위기 속 구원투수, 하이브리드
그렇다면 이처럼 막대한 비용과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에 투자하려면, 어디선가 든든한 수익원이 받쳐줘야 할 텐데요. 지금 아시아 자동차 기업들에게는 때마침 ‘효자’ 노릇을 하는 분야가 생겼습니다. 바로 하이브리드 자동차입니다.
최근 미국 소비자들은 전기차의 비싼 가격, 부족한 충전소, 주행거리 불안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다시 하이브리드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하이브리드차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죠.
모닝스타의 빈센트 선 애널리스트는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는 하이브리드 기술의 선구자인 도요타와, 관련 라인업을 대폭 강화해 온 현대·기아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하이브리드차는 일반 내연기관차보다 높은 수익을 내주기 때문에, 미국 현지 투자라는 거대한 지출을 감당하고 ‘치킨 게임’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실탄’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중국이 없는 미국, 뜻밖의 행운
강력한 하이브리드 라인업이 ‘공격’을 위한 창이라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이들에게 ‘수비’를 위한 방패가 되어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이 중국산 전기차에 100%라는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BYD 같은 중국 업체들이 미국 시장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거든요.
리서치 회사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의 유스티나스 리우이마는 아시아 자동차 기업들이 “아시아 신흥 시장에서와 달리, 미국에서는 중국과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동남아 등 다른 시장에서 중국 전기차의 거센 도전에 시달리는 현대차와 도요타에게, 강력한 경쟁자가 없는 미국은 어떻게든 지켜내야만 하는 더욱 소중한 시장이 된 겁니다.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 그리고 새로운 질서
그렇다면 이 거대한 투자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펠럼 스미더스 어소시에이츠의 줄리 부트 애널리스트는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고 경고합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관세의 영향이 이미 시장에 반영됐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아직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이 관세의 영향을 완전히 반영한 연간 실적 전망치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들이 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전망치를 수정하면 투자자들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아시아 자동차 기업들은 관세가 촉발한 ‘치킨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이브리드 판매로 번 돈을 쏟아부어 ‘미국 현지 생산’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올라탔습니다. 게다가 강력한 중국 경쟁자가 없는 미국 시장의 매력은 이들의 선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죠.
이런 복잡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현대차의 28조 원 투자는 단순한 ‘도박’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 선택’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앞서 언급된 줄리 부트 애널리스트가 말했듯, 이번 관세는 정말로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입니다. 앞으로 산업은 더욱 현지화된 기업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강자는 약자를 흡수하며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겁니다.
결국 미국의 정책은 의도했던 대로 더 많은 자동차가 미국 땅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다만 그 주역이 전통적인 미국 기업이 아닌,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해 스스로 ‘미국 기업’이 되기로 선택한 아시아의 거인들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그 결과가 우리가 앞으로 탈 자동차의 모습과 한국 경제의 미래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