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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세계 해상 물류의 핵심 통로인 파나마 운하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파나마 운하청(PCA)이 탄소 배출량이 적은 선박을 위해 별도의 전용 통과 슬롯인 ‘넷제로 슬롯(NetZero Slot)’을 신설, 운영하기로 했는데요. 이는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는 선사들에게 명확한 시장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해운업계의 탈탄소 전환을 지원하려는 운하 당국의 구체적인 정책 의지로 풀이됩니다.
이번 조치는 ‘친환경’이 해운 시장에서 어떻게 실질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글로벌 공급망 관계자들에게 ‘지속가능성’이 더 이상 무의미한 구호가 아닌, 운영 효율성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해운업의 탈탄소, 거스를 수 없는 흐름
파나마 운하가 ‘넷제로 슬롯’을 도입한 배경에는 전 세계 해운업계가 직면한 ‘탈탄소’라는 과제가 있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해운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넷제로(Net-Zero)’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전 세계 교역량의 약 80%를 담당하는 해운업은 글로벌 경제의 근간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산업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선사들은 규제 강화에 대응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친환경 기술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파나마 운하 역시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자체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번 ‘넷제로 슬롯’은 그 목표를 향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 중 하나입니다. 또한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통항 제한 조치를 겪으며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맞았던 파나마 운하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욱 적극적으로 지속 가능성 의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리야 에스피노 데 마로타 파나마 운하 부청장은 “넷제로 슬롯은 세계 무역의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에 대한 우리의 명백한 약속”이라며, 저탄소 미래로 전환하는 고객(선사)들과 협력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습니다.
넷제로 슬롯, ‘우선 예약’이 전부는 아니다
‘넷제로 슬롯’을 확보한 선박은 단순한 우선 통과권을 넘어, 운항 효율성과 예측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혜택을 패키지로 제공받습니다. 이는 친환경 선박에 투자한 선사들에게 확실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려는 파나마 운하청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스케줄 자율성: 배정된 주(Week) 내에서 선사가 원하는 특정 통과 날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기선 서비스의 생명인 ‘정시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합니다.
24시간 내 통과 보장: 예약이 확정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24시간 내에 운하 통과를 보장받습니다. 예기치 않은 대기 시간으로 인한 연료 소모와 비용 증가, 납기 지연 등의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JIT(Just-in-Time) 서비스 자동 적용: 선박이 운하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통과 일정을 조정해 주는 JIT 서비스가 자동으로 포함됩니다.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없애고 운항 속도를 최적화하여 추가적인 연료 절감과 탄소 배출 감축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운영 유연성 확보: 긴급한 상황이나 선대 운영 계획 변경 시, 동일한 자격을 갖춘 다른 선박으로 예약을 교체하거나 양도할 수 있는 유연성이 부여됩니다. 이는 선사의 자산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경매’에서 ‘친환경 기준’으로: 운하 통과 자격 변화
지금까지 파나마 운하의 통과 슬롯 예약은 복잡한 랭킹 시스템과 함께 치열한 경매를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특히 가뭄 등으로 통과 선박 수가 제한될 때는 슬롯 확보를 위한 경매가가 수십만 달러를 호가하기도 해,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선사에 유리한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경매 시스템은 선사들에게 큰 재정적 부담이자 운항 스케줄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해왔습니다. ‘넷제로 슬롯’은 이러한 비용과 불확실성을 제거해 준다는 점에서 친환경 선박의 경제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넷제로 슬롯’은 아무 선박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경매가 아닌 ‘친환경성’을 기준으로 한 경쟁 우선순위 시스템을 통해 슬롯이 배정되며, 그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핵심 요건은 이중 연료(Dual-Fuel) 추진 시스템입니다. 현재 가장 현실적인 친환경 대안으로 꼽히는 이중 연료 사용이 가능한 선박이어야 합니다. 이는 LNG, 메탄올, 암모니아, LPG 등 다양한 대체 연료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이중 연료 선박인 것을 넘어, 탄소 집약도 계수가 75 gCO2e/MJ 이하인 ‘녹색 연료(Green Fuel)’를 최소 1가지 이상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녹색 메탄올, 녹색 암모니아, 바이오-LNG, 바이오-LPG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 연료들을 운하 통과 시 반드시 사용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이는 친환경 연료 인프라가 확충되었을 때 즉시 전환할 수 있는 선박의 ‘미래 가치’와 ‘기술 투자’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동일한 자격을 갖춘 선박들이 경쟁할 경우, ▲화물을 가득 실은 만재 상태의 선박 ▲파나마 운하의 통행료 산정 기준이 되는 PC/UMS(Panama Canal Universal Measurement System) 톤수가 더 큰 대형 선박 ▲과거 파나마 운하에 더 많은 통행료와 부대 서비스를 지불하여 기여도가 높은 선박 순으로 우선권이 부여됩니다.
미래 해운 시장의 키워드, ‘친환경 선박’의 전망
파나마 운하의 이번 결정은 친환경 선박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관련 시장 데이터는 이미 뚜렷한 성장세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 시장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친환경 해운 기술 시장은 2024년 223억 1천만 달러에서 연평균 25.89% 성장해 2032년에는 1,407억 4천만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머스크(Maersk), 에버그린(Evergreen) 등 글로벌 주요 선사들은 이미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그린 메탄올을 연료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선을 대량 발주하며 시장 변화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파나마 운하의 ‘넷제로 슬롯’ 도입은 시작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주요 항만과 운하에서도 유사한 정책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환경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와 동등하게 평가받는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제 친환경 기술 확보는 비용 문제를 넘어, 미래 시장의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